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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1월 3일)는 대한민국의 기업인 겸 교육가, 관광업자이다. ] 장로교 목사 전주부의 아들이며, 수필가 전숙희의 남동생이었다. 파라다이스 그룹의 창업주이며, 카지노업과 교육 사업을 하였다. 본관은 담양.lasvegasadvisor.com 호는 우경(宇耕)이며 서울특별시 출신. 1927년 5월 16일 서울특별시 종로구(鍾路區) 계동에서 장로교 목사 전주부(田周富) 와 계성옥(桂成玉)의 2남 5녀 중 넷째이자, 수필가 전숙희(田叔禧) 의 남동생이었다. 아버지 전주부는 생애중 14곳의 개척 교회를 설립한 목회자이자 기독교 운동가였다. 워커힐 카지노 사업을 맡고 있는 파라다이스는 지난 2002년 11월 코스닥에 등록�[https://www.pinterest.com/charlottesfinds/korean-awe-inspired-board-2/ �으며] 파라다이스 호텔체인은 파라다이스호텔 제주, 케냐의 파라다이스 사파라파크호텔, 파라다이스호텔 부산, 파라다이스호텔 도고, 파라다이스호텔 인천 등 국내 토종 호텔 브랜드로 유명하게 되었다. 이후 계열사별로 전문 CEO체제를 구축, 그룹 경영에서 한발 물러섰으며 2004년 계원학원 이사장을 맡으면서 그룹경영에서 물러난 후 같은해 11월 3일 향년 78세로 사망했다.


분명한 것은 그가 장존과 같은 시기에 머라지호텔 카지노에 있었다는 점이다. 장존은 96년 2월 28일에서 3월 2일 사이에, 최창식은 "2월 29일경"에 도박 돈을 빌린 것으로 문제의 장부�[https://www.dontmesswithtaxes.com/gambling/ � 기록돼] 있다. 본지의 취재에 따르면 최창식씨는 당시 한국일보 회장실 비서였다. 당시 한국일보 회장은 장재국씨였다. 그렇다면 장존은 장재국씨를 말하는 것인가. 가장 가능성이 높은 추론은 그렇게 될 수밖에 없지만 여기에서 잠시 결론을 유보하고 피의자 신문조서의 또다른 대목을 보자. 장존의 정체를 파악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새로운 인물이 등장한다. 문:위 요약경과보고서에 나와 있는 임무박은 누구인가요. 답:네, 임무박은 제주도에서 호텔 카지노를 하였던 사람으로 알고 있으며 장존과 함께 미라지호텔 카지노에 오는 사람으로서 마카오리가 담당을 하고 있으며 96. 3.2-4까지 금액불상을 차용하여 97.5.29경에 10만불을 변제하고 6.30 현재 미화 40만불이 미수금으로 되어 있습니다.


장존, 최창식, 임무박. 세 사람은 비슷한 시기에 미라지 호텔 카지노에 있었다. 도박자금 차용일은 하루이틀씩 차이가 나지만 세 사람은 동행했을 가능성이 많다. 로라 최는 임무박씨가 "장존과 함께 머라지호텔 카지노에 오는 사람"이라고 진술했다. 임무박씨는 한국 카지노계에서 정덕진, 정덕일 형제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인물로 알려진다. 카지노계에 정통한 한 재미교포 출신 국내사업가는 "임무박씨는 장강재 전 한국일보 회장과 친분이 깊었던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는 "임무박씨가 장강재 회장이 작고한 이후에 그의 동생인 장재국 회장과 가까운 사이를 유지해 온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세 사람의 공통점은 97년 7월의 검찰수사에서 모두 무사했다는 점이다. 장존은 1백86만달러, 임무박은 50만달러, 최창식은 10만달러를 빚내 도박을 한 것으로 ‘로라 최 리스트’에는 적혀 있지만 그들은 구속은커녕 벌금형도 받지 않았다.


현행 외환관리법은 1만달러 이상을 당국의 허가없이 가지고 출국하거나 거래하는 것은 불법으로 되어 있다.koreasportsbetting.com 왜 이들은 특혜를 받았을까. 이 모든 의혹은 결국 장존의 정체와 닿아 있다. 장존은 검찰이 함부로 손대기 힘든 대�[http://koreasportsbetting.com/uncategorized/???????/attachment/???????/ �민국의] 유력자였기 때문에 그와 동행했던 최창식과 임무박도 검찰수사로부터 자유로웠을 것이란 추측이 충분히 가능한 것이다. 만에 하나 이들이 구속되지 않은 이유가 돈만 빌렸을뿐 도박을 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그러나 그럴 가능성은 없다는 것이 로라 최의 진술이었다. 다음은 97년 7월 29일 작성된 또다른 수사기록의 일부다. 도박꾼들이 돈을 빌리는 과정과 그 용도에 대해 언급한 것이다. 답:한국인 고객이 와 도박자금 차용을 요청하면 카지노 총책임자와 한국인 담당 마케팅 책임자가 고객에 대한 정보를 받은 뒤 신용한도를 결정한다. 고객이 카지노의 마커(차용증서의 일종)에 차용금액, 날짜를 적고 본인 서명 후 내게 주면 카지노에 보관시킨다.


그런 다음 곧바로 카지노 컴퓨터에 입력한다. 출납계 담당자나 테이블의 플로맨들이 컴퓨터에 입력된 차용금액을 보고 칩을 계산해 준다. 칩은 1달러짜리부터 2만5천달러짜리까지 8개 종류가 있다. 문:한국인에게 현금으로 지급하는 경우는 없나. 답:카지노에서 쓰라고 빌려주는 돈이므로 칩으로만 지급한다. 문:피의자(로라 최)가 소지해온 ‘마케팅 책임자에 의한 미라지호텔 요�[http://www.koreawager.com/en/sports-news-en/baseball-news-en/national-baseball-team-coach-post-has-short-list-2/ �경과] 보고서’의 컴퓨터 출력 용지에 적힌 내용은 모두 카지노측으로부터 돈을 빌린 사람들의 내역이란 말인가. 문:도박과 관련없이 돈을 빌린 사람은 없나. 이상의 진술로 볼 때 위 세 사람이 빌린 돈은 명백히 도박을 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검찰은 이들에 대해 전혀 손을 대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왜 검찰은 1백86만달러에 달하는 거액을 해외에서 불법도박으로 날린 장존을 추적해 잡아내지 못했을까. 당시 담당검사였던 최정진 검사는 7월 15일 오후 기자와의 전화인터뷰에서 장존의 정체를 파악해내지 못한 이유를 묻자 이렇게 답했다. 그러나 가장 기초적인 입증자료는 피의자 신문조서에도 나와 있다. 최창식은 장존의 비서이고 장존은 최창식을 비서로 둔 사람이다.


동행자로 보이는 최창식을 조사했다면 금방 장존의 정체는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최 검사는 그와 관련한 추가질문에 답하지 않고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97년 7월 수사 당시 서울지검장은 얼마 전 검찰을 떠난 안강민씨(사시 8회, 현 변호사)였다. 다음은 안강민 전 서울지검장(97년 1월∼98년 3월)과 7월 16일 오후 6시 30분에 가진 전화 인터뷰.lasvegassportsbetting.com 문: ‘로라 최 리스트’에 오른 사람 중에 한국일보 회장 장재국씨가 있었는가. 답: "그 당시 그런 풍문이 있었다. 작고한 장강재라는 설도 있었다. 문: 결국 장존이 누구인지 알아내지 못했나. 문:장존은 비서인 최창식과 함께 라스베이거스에 갔다고 되어 있으니 최창식이 누구인지를 조사하면 금방 장존의 정체가 드러날 것 아닌가. 최창식은 당시 장재국 한국일보 회장의 비서였다. 정말 그런 기초적인 것도 몰랐단 말인가.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다. 안강민 전 서울지검장은 "같다"라는 말과 "기억이 잘 안난다"라는 말을 자주 사용했다. 최창식씨는 한국일보 여의도 영업소(여의도동 21-3 서울상가 1층) 소장직을 겸임하면서 장재국 회장의 비서로 일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7월 16일 본지기자가 여의도 영업소를 찾아갔을 때 한 직원은 "최창식 소장님은 1년에 한번 올까말까 한다"면서 "작년 10월에 한번 왔다"고 말했다. 사무실의 한 책상엔 최창식 명의의 통장 계좌번호가 네개 붙어 있었다. 또다른 직원은 그가 작년에 소장직을 그만두었다고 말했다. 한국일보 회장실의 한 직원은 최창식씨가 현재 비서로 일하고 있느냐고 묻자 "여기에 안 계시고 다른 곳에 계신다"고 했다가 나중에는 "그런 분이 없다"고 말을 바꿨다. 한국일보측은 최창식씨가 언제 장재국 회장의 비서로 있었는가를 묻는 질의에 7월 17일 낮 12시 현재까지 응답해 주지 않았다.